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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국’ 핀란드 경쟁력의 원천은 혁신과 복지, 배움의 선순환 본문
‘혁신과 포용’ 현장을 가다 ① 핀란드 // 출처 : https://www.hani.co.kr/arti/economy/heri_review/949397.html
노키아 몰락 뒤 스타트업 열풍 ‘창업 1위’ 핀란드의 저력 보여줘
‘노동 보호’ 양질의 고용·복지 체계 혁신 장려하는 ‘일상 속 배움’ 문화
잘 설계된 정부 차원의 혁신정책 “실패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는 혁신과 창업의 근본 토대로 기능”
촘촘한 사회안전망 덕에 코로나 위기 대응도 ‘모범’ 외신 “북유럽의 프레퍼족” 찬사
코로나19 사태가 지구촌을 뒤흔들고 있다. 이 팬데믹에서 자유로운 나라는 없다. 국제 무역이 뒤틀리고 각 나라의 노동시장도 요동친다. 전례 없는 위기를 맞은 지구촌은 끝모를 불확실성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 세계화의 경로, 국가의 귀환, 권위주의와 민주주의, 위험과 문명 등 각종 담론이 분출하나, 뚜렷한 것 없는 혼돈의 시대다. 지구촌 각국에 어느 때보다 새로운 각성과 함께 혁신과 창조적 응전이 요구된다.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은 연세대 복지국가센터 연구진과 공동으로 지난 2월 중순 우리 사회의 중요한 화두인 혁신과 포용의 관계 및 노동시장의 변화에 따른 각국의 대응을 살피기 위해 선진 주요국을 탐방했다.
북유럽의 핀란드, 유럽의 영국과 독일, 그리고 미국 등 4개국이다.이 글은 그 첫 회인 핀란드 탐방기다. 대표적인 ‘혁신적 포용국가’로 평가되는 북구의 이 작은 나라는 어떻게 혁신과 보편적 복지란 성취를 동시에 이룩했는가? 연구진은 우선 이 물음에 대한 대한 답을 찾아 지난 2월 중순 수도 헬싱키 등지를 방문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확산한 이후에는 현지와 추가 접촉해 ‘세계행복지수 1위와 국제경쟁력 1위’를 동시에 달성한 나라 핀란드는 과연 코로나19의 위험에 어떻게 맞서고 있는지도 함께 살폈다.
■ 혁신과 창업의 메카, 알토스타트업센터
“아이디어에서 영향력까지(From ideas To impact)”‘유럽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헬싱키 근교의 위성도시 에스포에 있는 알토대학 내 알토스타트업센터에 들어서면 곳곳에서 마주하는 문구다. 지난 2월 중순 이 센터를 다녀온 뒤 한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이 슬로건은 “기업가 정신을 기반으로 세상에 영향을 끼친다”는 핀란드의 창업과 혁신의 정신을 응축하고 있다. 실제 모바일 게임 ‘앵그리버드’의 로비오 엔터테인먼트, ‘클래시 오브 클랜’의 슈퍼셀 등 핀란드가 내세우는 세계적인 유명 스타트업의 상당수가 이곳에서 아이디어를 잉태해 막강한 영향력으로 세계를 석권했다.
‘아이디어에서 영향력까지’란 슬로건이 새겨진 입간판이 알토스타트업센터에 놓여 있다.
그런만큼 핀란드가 이룩한 스타트업의 성취와 혁신에 관심 있는 각국 방문객의 발길이 늘 끊이지 않는다. 지난해 6월 문재인 대통령이 방문하면서 국내에도 꽤 알려졌다. 연구진이 방문한 날에도 입주해 있는 숱한 스타트업 관계자들이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거나 실험공간 등지에서 아이디어를 시연하는 등 분주히 움직이고 있어 이 센터가 명실공히 핀란드 스타트업의 산실임을 실감케 했다.내친김에 이 나라 유명 건축가 알바 알토가 설계한 운치 있는 캠퍼스 건물들을 감상하며 알토대학 캠퍼스 외곽에 있는 ‘스타트업사우나’의 장소도 찾았다. 스타트업사우나는 지난 2010년 설립된 알토대학이 만든 창업지원 프로그램이다. 사우나를 할 때 흠뻑 젖는 것처럼 학생들이 아이디어를 비즈니스 모델로 만들기 위해 열정을 다한다는 의미를 띠고 있다. 핀란드 스타트업의 신기원을 연 결코 놓칠 수 없는 역사적 공간이다.
핀란드 헬싱키 근교의 위성도시 에스포에 있는 알토대학의 ‘스타트업 사우나’ 공간에서 청년들이 창업 아이디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날도 한 무리의 청년들이 창업 아이디어를 두고 대화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들과 다른 쪽 한켠에서 노트북을 바라보며 나홀로 몰두하고 있는 한 청년에게 다가가 물으니 공대 컴퓨터공학 박사과정에서 재학 중이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핀란드에서 요즘 가장 뜨거운 의료 분야의 온라인 업체를 구상하며 창업을 모색 중이라고 자신의 구상을 설명했다.그를 비롯해 그곳에 드나드는 숱한 핀란드 청년들은 저마다 제2의 로미오, 제3의 슈퍼셀을 꿈꾸며 열정을 불태운다. 바로 그 열정이 인구 550만에 불과한 이 작은 나라가 세계에서 인구 대비 가장 많은 창업을 성취한 요소 중 하나일 것이다.
■ 읽고 보고 만드는 배움의 공간, 오디(헬싱키 공공도서관)
핀란드 방문 중 또 하나 인상적인 곳은 헬싱키 중앙도서관이었다. ‘오디’(Oodi)라고 불리는 이 도서관이 추구하는 슬로건은 바로 “우리 모두를 위한 곳”이다. 빼어난 외관만으로도 충분히 매혹적인 이 도서관의 진짜 매력은 오히려 내부의 독특한 공간과 그에 담겨 있는 가치와 철학이다. 빼곡한 장서와 수험생용 열람실을 떠올리게 하는 우리에게 익숙한 도서관과는 외관부터 뚜렷이 다르다.
핀란드 헬싱키 공공도서관 오디의 내부 모습.
우주 행성에 온 듯한 느낌을 주는 둥근 천장, 측면의 거대한 유리 벽, 서가 곁에 놓여 있는 독서용 의자들은 하나같이 평범을 거부한다. 특히 3층 테라스에 놓여 있는 원목 의자들은 마치 여름날 해변이나 수영장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어른과 어린이를 위한 공간이 따로 구분돼 있지 않다. 책을 보든, 컴퓨터를 하든, 토론하든, 게임을 하든 각자의 방식대로 자유롭게 즐길 수 있다.
헬싱키 공공도서관 오디의 3층 서가 한 쪽에 조성된 유모차 주차공간
가장 시선을 사로잡는 곳은 1층과 3층에 조성된 유모차를 두는 공간이다. 그래서일까? 아이들을 데리고 와 책을 보거나 놀이를 즐기는 가족 단위 방문객이 꽤 많다. 아이들이 신발을 벗고 막 뛰어다니기도 한다. 그래도 문제가 될 게 전혀 없음은 물론이다.이 밖에 여럿이 토론할 수 있는 세미나 공간, 재봉틀을 돌리거나 간단한 공구로 작업하는 공간, 대형 모니터를 보며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게임방까지 갖추고 있다. 오디는 독서실이자 배움터이자 놀이터다. 도서관을 넘어 하나의 복합문화공간이라는 표현이 알맞을 듯하다. 시민은 물론 국외 여행객까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알토스타트업센터와 오디, 두 곳은 핀란드가 어떤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추구하는지, 동시에 핀란드가 가진 힘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시사한다.
■ 혁신적 포용국가 핀란드의 국제 성적표
알토스타트업센터와 오디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핀란드의 혁신과 창업, 배움의 성과는 이 나라가 이룩해온 국제 성적표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2019년 기준 국제비교 조사를 통해 본 핀란드의 성취를 보자.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4만8800달러로 세계 14위이지만 각종 삶의 질 지표에서는 세계 최상위권을 기록한다. 국민의 행복지수, 사회적 신뢰지수, 투명성 지수, 거버넌스의 질, 교육성취도, 국가혁신역량, 민주주의와 평등 지수 등 많은 분야에서 핀란드는 대체로 1위~3위를 하는 등 수위권에 있다. 이 수치로만 보면 문재인 정부가 강조하는 포용(복지)과 혁신을 동시에 거머쥔 나라, 이른바 ‘혁신적 포용국가’가 바로 핀란드라고 할 수 있다.
■ 코로나 19에 맞서는 ‘프레터족’의 대응
애초 연구대상은 아니었지만, 이쯤에서 잠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 있다. 코로나19가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지금, 핀란드는 어떻게 이 전례 없는 위기에 맞서고 있을까?6월7일 현재 세계보건기구(WHO) 통계를 보니, 핀란드의 코로나19 확진자는 6941명, 사망자는 322명이다. 이웃 나라 스웨덴이 확진자 4만3887명에 사망자가 4656명에 이르는 것에 견줘보면, 방역 성적표도 나쁘지 않다. 특히 세계 각국이 마스크 부족으로 애를 먹고 있지만, 핀란드 의료진은 마스크 걱정을 하지 않았다. <뉴욕타임스>는 이런 핀란드를 “북유럽의 프레퍼족(Prepper, 인류멸망에 대비한 사람들)”이라고 추켜세웠다.
하지만 사회적 거리두기 등 방역으로 인한 경제적 충격은 핀란드 또한 피할 수가 없다. 단기간에 실업 및 임시해고가 급증했다. 디지털화의 파고 속에서도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이 나라 노동시장에도 적잖은 여파가 일고 있는 것이다. 지난 4월 통계를 보니 실직한 구직자 수가 43만3100명으로 지난해 대비 2배가 넘었다. 실업률도 6% 수준에서 8.1%로 뛰었다.스타트업계에도 파장이 크다. 비즈니스핀란드(창업을 위한 재정 및 서비스를 지원하는 핀란드 고용경제부 산하 정부기관)의 조사를 보니, 85%의 스타트업에서 매출 감소가 예상되며, 35%는 심각한 상황이다.
핀란드가 자랑하는 북유럽 최대의 스타트업 축제인 ‘슬러시’마저 취소됐다. 지난 2008년부터 해마다 겨울 헬싱키에서 2만5천명의 스타트업 관계자들이 교류하는 행사가 올해 열리지 못하게 된 것이다.그렇지만 핀란드 스타트업계는 아직까지는 의연하다. “문제를 해결하고 적응하고 혁신하는 게 일상”이라면서 “위기가 기회라고 인식하는 분위기”라고 현지 한국인 창업가인 배동훈씨가 전했다. “안되면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된다”는 식이다.
핀란드 정부의 대응도 차분하다. 우리처럼 긴급재난지원금을 집행하거나 미국처럼 ‘코로나 머니’를 뿌리진 않는다. 복지국가답게 이미 짜인 기존의 사회안전망이 작동되기 때문이다. 해고자들은 촘촘히 짜인 실업수당을 받아 생계를 이어갈 수 있다. 만약 코로나19에 감염됐거나 감염이 의심돼 출근이 어렵다면 상병수당을 받을 수 있다. 자영업자도 마찬가지다. 수당은 병이 들기 전 6개월간 과세소득을 기준으로 책정되지만 아무리 적어도 하루 27.86유로(약3만6천원)를 최대 300일까지 받을 수 있다.헬싱키 대학교 박사과정에 있는 신영규씨에 따르면, 이번 팬데믹 위기 상황에서 핀란드 정부가 신설한 것은 1~5인의 직원을 두고 있는 영세 자영업자를 위한 보조금이다. 나홀로 자영업자나 프리랜서도 지방정부에 2천 유로의 보조금을 신청할 수 있다.
원칙적으로는 이런 보조금은 폐업해야만 받게 되는데, 핀란드 정부는 최근 법을 개정해 영업을 일시 중단한 자영업자들에게 일시적으로 실업급여를 받을 자격을 줬고, 영업을 계속해도 월수입이 일정 이하로 떨어진 이들은 올 6월30일까지 한시적으로 노동시장보조금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핀란드의 이런 모습은 튼튼한 사회안전망이 시민의 삶의 안정과 안전에 얼마나 중요한지, 나아가 위기가 닥쳤을 때 얼마나 높은 대응력을 보여주는지를 새삼 일깨워준다. 기실 핀란드는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처럼 동족 간의 내전과 외세의 침탈, 식민지를 겪은 뼈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런 만큼 위기에 강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기회로 전환하는 데 남다른 면모를 보인 나라다.
■ ‘핀란드의 힘’의 생생한 사례…노키아의 몰락과 스타트업의 부활
핀란드의 대표적인 정보통신기술 업체 노키아의 몰락을 둘러싼 일련의 과정은 ‘핀란드의 힘’의 비결과 그 작동 메커니즘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사례다. 인구수 대비 창업 세계 1위, 전체 제조업 생산의 77%(2016년 기준)를 중소기업과 스타트업이 담당하는 나라가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알 수가 있다.1998년 휴대폰 제조산업 세계 1위는 노키아였다. 이 굴지의 기업은 비대해지고 관료화하면서 2011~2012년 1만300여명의 고용인력을 해고하는 등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노키아 몰락은 ‘창조적 파괴’ 과정이었다. 노키아의 모바일 엔지니어들이 스타트업 생태계로 쏟아져 나오면서 창업에 도전하는 문화가 잉태했다.
그 결과, 오늘날 게임 상품으로 세계를 휩쓴 로비오와 슈퍼셀 등의 스타트업들이 핀란드 경제의 새로운 견인차로 떠올랐다.지난 2월 알토스타트업센터에서 연구진을 안내한 한국인 배동훈씨 또한 노키아가 배출한 창업가다. 노키아에서 일하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창업가로 나선 그는 현재 알토스타트업센터에 입주해 ‘포어뱅크’라는 스타트업을 운영한다. 그는 “(여기에선) 많은 젊은이들이 창업에 나서는데, (센터에 입주한 한 스타트업 사무실을 손으로 가리키며)이 회사는 우리나라로 고등학생들이 창업한 경우고, 심지어 중학생 창업자도 봤다”며 이 나라의 뜨거운 창업 열풍을 전했다.
한국인으로 핀란드에 정착해 스타트업을 운영 중인 창업가 배동훈씨(왼쪽)가 연구진에게 알토스타트업센터를 안내하고 있다.
■ 혁신과 복지, 고용, 배움의 선순환 시스템한국의 삼성에 비견되는 굴지의 대기업인 노키아가 몰락했는데도 경제위기를 낳지 않고 오히려 수천개의 스타트업 탄생이란 창업 열풍을 일으킨 저력은 무엇에서 비롯된 것일까?현지에서 만난 블루칼라노조연맹 등 산별노조 관계자들과 배동훈씨의 설명을 종합하면, 대규모 정리해고 당시 노키아는 그를 비롯한 해고 대상자들에게 2개월~6개월간 전직을 위한 시간을 주었다. 이때 노키아는 창업에 관심 있는 이들에겐 특별히 회사 자금으로 직업재교육 과정을 밟도록 했다. 이름하여 ‘브릿지(Bridge)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노키아 내의 새로운 일이나 다른 직장을 알선하는 재교육 지원프로그램이다. 동시에 창업을 위한 포괄적이고 구체적인 개인별 지원과 조언을 제공하는 회사 차원의 창업가 양성 프로그램이기도 헸다.참여자들은 자신의 사업을 시작할 때 1인당 2만5천 유로 또는 4명까지 총 10만 유로의 종잣돈을 지원받았다. 이 프로그램은 1천개의 새 기업을 탄생시겼고, 2011년에서 2013년까지 노키아 직원을 포함한 무려 1만8천명이 혜택을 받았다.정부의 창업지원정책 또한 중요한 구실을 했음은 물론이다. 당시 정부기관인 테케즈(Tekes, 국가기술혁신청으로 현 비즈니스핀란드의 전신)는 대기업의 연구성과를 중소기업이 활용해 사업화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하는 ‘이노베이션 밀’(Innovation Mill) 프로그램, 초기 기술기업과 글로벌 벤처펀딩을 연결하는 ‘비고’(vigo)프로그램 등을 통해 꾸준히 창업지원에 나섰다.■ 상생과 타협의 노사관계와 보편적 복지시스템상생과 타협의 노사관계는 이런 프로그램과 지원정책이 작동되도록 하는 또 하나의 요소였다. 노키아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일부 생산직 노조원들의 저항이 없지는 않았지만, 노조는 회사 쪽과 협상을 통해 문제 해결에 나섰다. 현지에서 만난 핀란드 기술생산직노조(산별노조)의 아르토 헬레니우스는 “시위를 한다고 결정이 바뀌는 게 아니기에 우리는 어려움이 생겼을 때 어쨌든 해결하고자 하는 새 방법을 찾으려고 한다”고 말했다.무엇보다도 핀란드의 창업과 혁신의 가장 중요한 기반은 튼튼한 노동자 보호체계를 비롯한 사회안전망, 즉 복지란 사실도 어렵사리 확인할 수 있다. 배동훈씨는 “실직 뒤 한동안 기존 소득의 70%를 받았다”면서 지금껏 자신이 창업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실업수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강조했다.
핀란드 기술생산직 노조의 아르토 헬레니우스가 핀란드 노동법과 고용보호 시스템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핀란드의 고용보호시스템은 노조가 자율적으로 운용하는 ‘겐트시스템’에 기반을 둔 실업보험에 의해 지급되는 소득비례 실업수당과, 이와 별도로 핀란드 사회보험청(KELA)이 지급하는 기초실업수당 및 노동시장보조금으로 구성돼 있다. 실업보험에 가입되어 있는 노동자가 실업에 처할 경우, 그들은 소득비례 실업수당을 최대 400일(주 5일 기준 80주) 동안 받는다. 이 실업급여 수준은 고용 당시 받은 임금에 따라 달라지지만 대체로 기존 임금의 50~70% 수준이다.
실업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노동자가 실업자가 되면 최대 400일 동안 기초실업수당을 받을 수 있다. 기초실업수당의 급여 수준은 월평균 697유로(약 91만원) 정도이다. 노동시장보조금은 고용 기록이 없는 실업자 혹은 소득비례 실업수당이나 기초실업수당을 다 받은 뒤에도 실업에 빠진 사람에게 지급된다. 노동시장보조금은 자산조사를 거쳐 일정 소득 이하의 실업자에게만 지급되며 지급 기간의 제한은 없다.여기에 무상보육, 무상의료, 무상교육 등 보편적 복지국가로서 갖춘 다양한 복지시스템은 이 나라 실직자, 청년, 나아가 모든 시민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할 수 있는” 혁신과 창업 열풍의 근본적 토대로 기능했다.
임신 전에는 출산 예정일 최소 5주 전부터 모성휴가를 낼 수 있다. 출산 후 산모는 아이 아빠와 함께 부모휴가를 158일 추가로 받아 아기 출산 전후로 거의 9개월 동안을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이 기간에는 부모수당이 나오는데 연봉의 약 70%를 받는다. 직장인만이 아니라 자영업자, 학생, 실업자도 받을 수 있다. 아이가 태어나 만 17살까지 자랄 동안에는 아동수당이 지급된다.
이외에 육아지원금도 있다.핀란드 아이들은 6세 또는 7세부터 종합학교에 다닌다. 우리로 치면 초중등학교를 합친 것으로 9년 동안 일체의 비용이 모두 무료다.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무상으로 학교에서 식사하며, 고교 졸업 후 부모한테서 독립할 경우엔 주택 임대료의 80%를 지원받을 수 있다. 아플 때는 대부분의 병원비는 무료다. 나이 들어 더는 일할 수 없을 때는 노령연금이 있다.핀란드 사회에서 복지는 사회적 부담이나 비용이 아니다.
한국에서 자주 등장하는 복지 포퓰리즘이란 말은 애초부터 없다. 복지는 “혁신과 성장을 위한 디딤돌”이며, “글로별 경쟁력을 만들고, 경제성장과 일자리는 열매를 맺도록 하는 기본적인 인프라”란 인식이 두텁다. 헬싱키 대학의 헤이키 힐라모 교수는 ”사회안전망은 사회적 위험을 완충시켜주기 때문에 혁신과 복지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는 기본 토대“라고 말했다.노키아 몰락에 이어진 스타트업 열풍의 사례를 통해 본 핀란드 스타트업의 성취의 배경을 요약하면, 회사의 직업재교육 및 창업지원 프로그램, 상생과 타협의 노사관계, 그리고 질 높은 고용·복지 인프라 등이 복합적으로 기능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 공교육의 틀을 넘어 일상 속에서 이뤄지는 열린 배움
하지만 고용보호를 비롯한 질 높은 복지체계를 갖췄다는 것만으로 혁신과 창업 열풍이 절로 이뤄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 또한 확인 가능하다. 즉 복지만으로 혁신을 가능케 하는 건 아니란 것이다. 보편적 복지를 갖춘 나라는 적지 않지만, 그들 나라가 모두 혁신국가는 아닌 게 현실이다.
핀란드의 성취에는 잘 설계된 국가혁신 정책이 있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다양한 혁신 지원 정책이 주효했다는 시각인데, 이는 경제규모 측면이나 개방경제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핀란드와 비슷한 우리나라가 눈여겨볼 대목이다.핀란드는 일찍이 혁신과 연구개발 투자에 눈을 떴는데,혁신정책이란 개념이 등장한 것은 8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는 산업과 과학기술 부문에 국한했다. 그 후 혁신정책은 단순히 경제성장에만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복지와 민주주의를 증진하고 지역을 활성화하는 정책 등으로 진화했다. 이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곳이 바로 국가기술혁신청(현 비즈니스 핀란드)이다.
헬싱키에 있는 비즈니스핀란드 건물의 전경. 혁신 요소를 찾아내 개발과 시장 진출을 지원하고 글로벌화로 수출을 촉진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 기관의 보건분야 책임자인 미나 헨돌린은 “우리의 목표는 혁신과 국제협력을 통해 지속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를 위해 “펀딩과 컨설팅 등 각종 기업 지원과 혁신 프로그램을 운용하고 국제적 네트워크 구축 및 해외시장으로부터의 직접투자, 이 밖에도 연구수행과 재능있는 인력 양성 등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펴고 있다”고 소개했다.
핀란드 사례가 시사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대목은 다름아닌 일상 속 배움이다. 여기서 배움은 각종 교육 시스템을 포괄하되, 개인의 자발적이고 적극적 행위를 강조하는 개념이다. 이 배움이 혁신과 복지 사이를 잇는 다리 구실을 함으로써 혁신과 복지, 배움의 선순환 시스템을 구축해 이 나라의 놀라운 성취를 지속해서 이루는 바탕이 됐다는 분석이다.
사회보험청의 기본소득 실험의 책임자로 널리 알려진 올리 캉가스 투르쿠 대학 교수는 “작은 나라인 핀란드는 기름, 석탄, 다이아몬드와 같은 자원이나 다른 것이 없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 키워나가는 데 투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슈였다”면서 “그런 투자를 통해 사람들의 머리에서 새로운 혁신적 생각이 나오는 게 가능했다”고 말했다.기실, 핀란드에서 배움은 공교육의 틀을 넘어 생활이며 문화다. 헬싱키 중앙도서관 ‘오디’는 이를 잘 보여주는 현장이다. 핀란드 교육부의 통계를 보면, 시민의 약 80%가 도서관을 이용하며, 1년에 1인당 11회 방문하고 19권 정도의 책을 빌린다고 한다. 시민의 도서관 이용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
한국에선 기본소득 실험 책임자로 알려진 올리 캉가스 투르쿠 대학 교수는 자원이 없는 핀란드에선 사람에 대한 투자가 중요하며, 혁신은 이런 투자의 결과라고 풀이했다.
이런 배움은 박물관과 각종 기념관, 동물원 등 학교 안팎 다양한 곳에서 일상적으로 이뤄지며 ’창조적이고 역량 있는 개인’을 길러낸다. 헬싱키 대학의 레이조 미에티넨 교수는 이런 배움과 혁신의 연관성은 어린 시절 유치원 교육과정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설명했다.“예컨대, 유치원에 있는 어린이들이 달나라에 있는 사람을 초대하고 싶다는 얘기를 했을 때, 선생님과 아이들이 그 방법을 학습한다. 로켓이 왜 필요하고, 로켓을 어떻게 만드는지, 나아가 우주를 연구하는 등의 과정이 자연스럽게 놀이로 이뤄진다. 이런 과정에서 아이들은 우주비행사에 대해 상상을 하는 식이다. 이런 상상이 혁신의 기초가 된다.” 이름하여 ‘놀이기반 교습법’이다.
■ 유년기의 놀이기반 교습이 창조적이고 역량 있는 개인 길러
이런 교습법과 교육관은 유년기 교육프로그램에 그대로 적용된다. 그래서 핀란드 어린이집에서는 알파벳이나 숫자, 어휘를 가르치기는 데 열중하지 않는다. 구체적 학습 목표도 없다. 오히려 하루에 몇시간은 야외에서 반드시 놀도록 하는 규정이 있을 뿐이다. 식사 함께하기, 서로 도와가며 우유를 잔에 따라주기, 설거지 등을 해결하는 법 등이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배우는 내용이다. 아이들을 놀게 해 창의력을 기르도록 하는 게 장래의 학습을 위한 첫걸음이란 인식에 기초한 교육이다.
알토스타트업센터 내의 한 창업가가 막간을 이용해 아이와 함께 놀이를 하고 있다.
이렇듯 “유치원 교육에서의 창의력이 핀란드 혁신과 연관돼 있다”는 그는 “특히 역할 놀이가 어린이들의 상상력을 증진하는 데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유년기에 갖는 상상력과 창의력이 혁신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거듭 강조한 그는 스칸디나비아 소속 국가들이 입학 연령을 낮춘 것도 이런 교육관과 관련 있다고 설명했다. 핀란드에서는 신임 총리가 취임할 때마다 정부가 국가 미래 보고서를 채택한다. 이는 국가의 정책집행의 중요한 로드맵이다. 이들 보고서에서 교육개혁은 늘 깊이 있는 이슈다. 노동시장의 변화와 미래를 전망하면서 미래의 인재상을 설정하는데, 그 핵심적 내용은 “미래에 어떤 새 기술이 소개되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배울 줄 아는 시민, 실패도 배움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고 도전할 줄 아는 시민”이라고 한다.
중앙정부 못지않게 지방정부의 다양한 혁신과 창업지원 정책도 스타트업 활성화의 또 하나의 요인이다. 사진은 연구진이 방문한 헬싱키 시내의 창업지원센터의 내부 모습.
헬싱키 대학의 레이조 미에티넨 교수는 혁신과 복지에 대한 핀란드 모델에 일찍이 주목한 학자다.
혁신과 복지, 교육(배움)의 상관관계를 일찍이 탐구한 헬싱키 대학의 레이조 미에티넨 교수는 “혁신을 이루는 것은 결국 사람이기 때문에 교육제도와 다양한 제도를 통해 사람들에게 가능성을 보여주고 그들이 참여하도록 자극하는 게 중요하다. 복지와 혁신이 좋은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고, 지역 기반의 다양한 주체들이 모여 협력해 사회적 혁신을 이끌어가는 방향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든든한 복지 △좋은 인재를 길러내는 훌륭한 교육 △국가와 제도에 대한 신뢰 △보편적인 헬스케어와 사회서비스 등 네 가지 공적 체계가 핀란드 성취 요인이라면서, 여기에 △평등의 가치와 △민주적 의사결정 등을 덧붙여 핀란드의 성취를 이룩한 요인으로 모두 여섯 가지를 꼽았다.핀란드의 성취 비결을 한두가지로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 시각에 따라 그 답이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핀란드가 미국식 시장자유주의를 쫓아간 게 혁신을 일으켰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는 것처럼….
이와 관련해 서현수 한국교원대 교육정책대학원 교수는 “핀란드 사례는 포용적 복지국가를 모색하는 한국 사회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다”면서 “오늘날 핀란드 모델에 대한 보다 면밀한 다차원적인 실증적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연구진이 만난 다수의 핀란드의 학자들, 노조 및 정당 관계자들이 다소 강조점이 다르더라도 한목소리로 말하는 공통적 요인들은 분명 있다. 바로 질 높은 고용·복지 시스템, 일상 속 배움의 문화, 잘 설계된 국가 및 지역 혁신정책. 그리고 이들이 선순환하는 메커니즘이 오늘의 핀란드의 성취를 이룩하는 주요 요인이라는 것이다.
“정답도, 오답도 없고, 대화와 토론의 과정으로 해결책을 찾는” 열린 배움이 창조적이고 역량 있는 개인을 길러내며, 질 높은 복지와 고용보호체계가 이들에게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는” 혁신과 창업에 도전하도록 하며, 이런 도전이 지속적 성장과 글로벌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나라는 핀란드 사례에서 보듯 불가능한 현실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를 위한 우리의 문제해결 능력, 응전이다.
헬싱키/글∙사진 이창곤 <한겨레> 논설위원 겸 <이코노미인사이트> 선임기자, 조현경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시민경제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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